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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 기념- 손길신 前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기획칼럼 제16話]- “3.1만세 운동으로 문 닫게 된 최초의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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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건설신문
기사입력 2019/02/28 [10:19]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본래 독립선언식을 종로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으나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과 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후 일제 경찰에 자수했지만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들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반일감정이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 서대문역     © 매일건설신문


이때 학생시위대가 집결한 장소가 서대문역 광장이었으며,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하는 등 서대문역광장이 연이어 만세운동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조선독립신문 제 9호에 “三月 二十二日 午前九時경 南大門外에서 吾神兄聖弟 五◯◯餘名은 獨立運動祝賀行列을 開始하여 西大門驛에서 數千의 應援隊와 合하여 走馬질풍의 勢로서 佛國領事舘에 이르러 獨立萬歲를 高唱하고 그 行列은 壯列을 極했다.”는 기사에 의하면 3월22일도 서대문역광장에 수 천 명이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려 철도와 전차종업원 등은 파업으로 제국주의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19년 3월 하순 남대문역에서 용산역으로 내려가지 않고 수색역을 경유하여 경의선과 직결되는 선로개량작업의 명분으로 서대문역 폐지를 결정하고, 바로 이어 3월31일자로 폐지하였으며, 1919년 4월 5일자 매일신보에는 서대문역 폐지로 인천에서 백 명이 넘는 통학생들이 남대문역에서 걸어오려면 학교가 멀어서 불편하겠다는 것과 미국인 콜부란이 소나무와 벚나무 등 미국에서 가져온 재료로 건축한 역이 없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다카하시(高橋)조역(助役 : 지금의 부역장)의 인터뷰내용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 서대문역 주변약도     © 매일건설신문


서대문역은 1897년 3월22일 경인철도 착공 시 계획된 경성(京城)역으로 서양인은 Seoul-Station이라 불렀으며,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 인천~경성 전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이 시작된 최초의 서울역으로 주변에 각국의 영사관과 학교들이 소재하여 주요한 역이었으며, 사람들은 경성역이라는 이름 보다는 ‘새문(서대문)밖 역(新門外驛)’ 또는 서대문과 가까이 있어 ‘서대문역’이라 부르게 됐다.

▲ 황성신문(1905.04.11.)당시 신문 보도     © 매일건설신문

 

1905년 3월27일 역명을 서대문역으로 변경하였다.

 

1919년 서대문역 폐지 후 1923년 1월 1일 당시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개명되었으며, 1947년11월 1일 경성역을 서울역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손길신 前 철도박물관장의 철도歷史 이야기 「제17話」에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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